분홍빛 봄, 슬픔을 닮은 이름
하얀 차로 제주를 누비는 기억의 여정
봄 햇살 아래서 드러나는 처절한 추억
그날의 상처가 마침내 빛으로 피어나다
[제주도민일보 우종희 기자] 제주의 봄은 유난히 간절하고 슬프다. 영화 ‘내 이름은’은 바로 그 아픔의 봄을 꿰뚫는 이야기다. 반세기를 넘긴 기억 속에서 묻혀 있던 이름과 죄책감,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고백이 교차하며, 잊힌 진실을 마침내 세상 밖으로 불러낸다.
아직 정명되지 못한 4·3 사건을 소재로 삼은 영화 ‘내 이름은’(정지영 감독)이 베일을 벗었다. ‘내 이름은’은 4일 노형CGV에서 시사회를 열고 제주 관객에게 선보였다.
영화는 1998년의 고등학생 ‘영옥’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촌스러운 이름이 콤플렉스였던 영옥은 우연히 서울에서 전학 온 경태와 눈에 들어 반장이 됐지만 교실 안의 폭력 앞에서 무기력한 자신을 마주한다.
그에게 ‘이름’은 부끄러움의 상징이자, 숨기고 싶은 존재의 흔적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이름이 단순한 불행의 표식이 아니라 피로 물든 과거를 대신 짊어진 타인의 이름임을 밝혀내며 관객을 깊은 슬픔으로 끌어당긴다.
그를 홀로 키워온 어머니 정순은 1949년 4월, 제주 4·3의 폭풍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잃고 살아남은 인물이다. 오랜 세월 입을 다물어온 정순에게, 봄의 햇살이 다시 기억을 흔들어 놓는다. 분홍색 선글라스와 하얀 차를 타고 제주 곳곳을 돌아다니는 그녀의 여정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억눌린 기억과 죄책감을 마주하는 치유의 길이 된다.
‘내 이름은’은 세 개의 시간축(현재의 영옥, 청소년기의 영옥과 정순, 그리고 정순의 어린 시절)을 오가며 전개된다.
이 교차 서사는 기억의 편린을 하나로 엮으며 개인의 슬픔을 공동체의 역사로 확장한다. 특히 영화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짓밟힌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서도 끝까지 인간다움을 지키려 한 이들의 모습을 통해 ‘삶의 존엄’을 되새긴다.
감각적인 연출과 절제된 대사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잔혹했던 시대를 정공법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름’이라는 가장 사소한 일상 언어를 통해 생존과 죄책감, 용서와 기억의 의미를 천천히 되묻는다. 그 속에서 관객은 깨닫게 된다.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단지 역사적 책임이 아니라 존재를 되찾는 인간의 본능임을.
78년을 건너온 약속이 영화 속에서 피어날 때 관객은 한 개인의 이름에 새겨진 진실을 통해 제주의 봄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기억은 고통을 낳지만 그 고통이야말로 새로운 봄을 부르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음을 ‘내 이름은’은 묵묵히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