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뮤지컬·문학 통해 세계와 만나다
평화·인권 가치 미래세대 전승 과제
제주4·3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한때 제주 안에서도 말하기 어려웠던 비극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며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기록으로 인정받았다. 유해 발굴과 진상규명, 명예회복을 통해 진실을 밝혀내는 작업이 이어졌다면, 이제는 영화와 문학, 공연예술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는 단계로 확장되고 있다. 제주4·3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제주4·3을 다룬 영화의 해외 영화제 수상, 제주에서 제작된 창작 뮤지컬의 전국 공연은 제주4·3이 기록과 증언을 넘어 문화 콘텐츠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록에서 세계유산으로
제주4·3은 오랜 시간 침묵 속에 머물렀다. 유족들은 가족의 죽음을 말하기 어려웠고, 생존자들은 이념의 낙인 속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진실을 기록하고 공개하는 일 역시 쉽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 창간한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 연재를 비롯해 유족과 시민사회, 연구자들의 진상규명 노력이 이어졌고, 이는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와 대통령 공식 사과, 특별법 제·개정으로 이어졌다.
제주4·3 기록물은 2025년 4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등재 명칭은 '진실을 밝히다: 제주4·3 아카이브'다. 등재 기록물은 모두 1만4673건으로, 군법회의 수형인 기록과 희생자·유족 증언, 진상규명 운동 자료, 정부 조사 기록, 문학작품과 영상 자료 등이 포함됐다.
제민일보가 창간호부터 장기 연재한 '4·3은 말한다'도 목록에 포함됐다. 지역 언론과 시민사회가 제주4·3 진상규명 과정에서 남긴 기록이 국제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번 등재로 제주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 무형문화유산에 이어 세계기록유산까지 보유한 '유네스코 5관왕' 지역이 됐다.
△스크린과 무대로 번진 4·3
최근 제주4·3은 문화 콘텐츠를 통해 새로운 관객과 만나고 있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내 이름은'은 제주4·3의 상처를 품고 살아온 한 어머니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는 독일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에 이어 이탈리아 우디네 극동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다. 제주4·3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가족의 기억과 상실, 회복의 이야기로 풀어내며 해외 영화제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제주4·3을 소재로 한 문화 콘텐츠는 영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제주도문화예술진흥원이 기획·제작한 창작 뮤지컬 '고래의 아이'는 제주 바다의 고래 전설과 제주4·3을 결합한 가족 뮤지컬이다. 이 작품은 6월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열리는 2026 KOCACA 아트페스티벌 쇼케이스를 시작으로 7월 제주문예회관, 8월 서울 KT&G 상상아트홀 대치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장편 영화 '한란' 역시 제주4·3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제주어를 사용하고 제주 여성의 삶과 가족의 생존을 중심에 놓으면서 제주4·3을 다른 방식으로 조명했다. 오멸 감독의 '지슬' 이후 제주4·3을 다룬 극영화가 다시 관객과 만났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문학 분야에서는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가 제주4·3을 국내외 독자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2021년 출간된 이 작품은 제주4·3의 상흔을 다룬 장편소설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다시 주목받았다. 제주4·3은 기록과 증언, 재판과 보상 절차를 넘어 영화와 공연, 문학 등 다양한 문화 형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미래세대와 세계인의 역사로
과거 제주4·3을 알리는 일은 진실을 밝히고 피해를 입증하는 과정이었다. 이제는 축적된 기록과 문화 콘텐츠를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할 것인지가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계기로 제주도는 4·3 기록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시·교육·연구 기능을 함께 갖춘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이다.
기록관은 단순한 보관 시설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나온다. 등재 기록물 1만4673건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시민과 학생, 연구자, 해외 방문객이 접근할 수 있는 전시·교육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다국어 해설, 체험형 전시, 문화예술 콘텐츠와 연계한 교육 프로그램 마련도 후속 과제로 꼽힌다.
제주4·3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진상규명 과정의 성과이자 새로운 출발점이다. 유해 발굴을 통해 행방불명 희생자를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는 작업이 계속되고, 기록을 통해 진실을 보존하는 작업도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영화와 문학, 공연예술이 더해지면서 제주4·3은 더 넓은 대중과 만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78년 전 제주에서 시작된 비극은 이제 기록과 문화 콘텐츠를 통해 다음 세대와 세계인에게 전해지고 있다. 김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