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연구소, 2026제주포럼 '4.3과 평화교육' 주제 세션 주관
제주4.3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로 4.3의 인류사적 가치가 조명받는 가운데, 비극의 역사적 경험을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 미래세대를 위한 평화와 인권 교육으로 어떻게 전승할 것인가에 대한 다층적인 논의가 이뤄졌다. 4.3을 단순히 구조적·물리적 폭력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문화적 폭력'에서의 접근과 극복이 필요하다는 제언이다.
사단법인 제주4.3연구소는 24일 오후 1시30분 제주해비치호텔 다이아몬드홀B에서 '2026 제주포럼' 4.3세션을 진행했다. '4.3과 평화교육'을 주제로 내건 이날 세션은 최호근 고려대학교 교수가 좌장으로 나섰고, 팩슨 반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본부 부서장, 전우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한건수 강원대학교 교수, 김세연 일본 백두학원 건국학교 교사가 발표자로 참석했다.
김정기 제주4.3연구소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제주4.3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지는 데 아주 중요한 몫을 한 역사"라며 "앞으로 제주대학교 등 지역 학계에 4.3을 전담 연구하는 인원과 인프라가 반드시 확충돼 전 세계 지식인들이 주목하는 연구 거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영상 인사말을 통해 "4.3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며 이제 인류가 함께 기억하고 성찰해야 할 역사가 됐다"며 "4.3의 가치를 후대에 올바르게 교육하고, 피해자와 유족의 명예 회복을 통해 진실과 정의, 평화의 가치를 전 세계로 확산하겠다"고 말했다. 고의숙 교육감 당선인 역시 축사를 통해 "교육을 담당하는 자로서 세계의 자산이 될 수 있는 평화 교육의 모델을 제주에서부터 만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
◇ 억압에서 기록으로…유네스코가 주목한 '보편적 평화 교육' 자원
팩슨 반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본부 부서장은 1만4600여점에 달하는 제주4.3기록물이 지닌 교육적 잠재력과 보편적 가치를 조명했다.
반다 부서장은 4.3 기록물의 가장 큰 특징으로 '시민들의 자발적 노력'을 꼽았다. 그는 "대부분의 기록물이 공식적인 절차를 거치지만, 4.3아카이브는 생존자와 유족, 언론, 시민단체들이 끈기를 가지고 망각에 맞서 싸운 결과물"이라며 "그동안 무시됐던 여성과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까지 포함한 포용적 역사를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 기록물은 폭력과 침묵을 뛰어넘어 진실을 추구하는 풀뿌리 운동부터 공식적인 화해와 국가의 책임에 이르기까지 이행기 정의의 완전한 궤적을 담고 있다"며 "국가적 중요성을 넘어 전 인류에게 평화로운 공존과 화해의 영감을 주는 훌륭한 교육 자료"라고 강조했다.
◇ 과거의 상처를 '나의 이야기'로…문화적 폭력 넘어서야
사회정신의학 전문가인 전우택 교수는 4.3 평화교육이 당면한 최우선 과제로 구조적·물리적 폭력을 다루는 것을 넘어서 '문화적 폭력'의 극복을 제시했다.
전 교수는 "직접 현장에서 행동이나 언어로 폭력을 사용하는 '물리적 폭력'이나 배후에서 강력한 원인으로 작동하는 정치적 억압, 경제적 착취 구조를 의미하는 '구조적 폭력'이 있지만, 이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같은 폭력을 정당화해주는 '문화적 폭력'에 있다"고 규정했다.
그는 "종교, 법, 사상, 언어, 예술, 학문 등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문화적 폭력이야말로 가장 밑에 깔려있는 거대한 것"이라며 "흔히 말해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식의 논리를 제공해주는 폭력을 의미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그러했고, 4.3 역시 같은 방식의 폭력이 있었다"고 진단했다.
전 교수는 문화적 폭력이 나타나게 된 근본적 이유를 성찰하며 4·3의 비극적인 서사를 일방적인 강의로 전달하는 것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어 "과거의 해석을 두고 벌어지는 이념적 대립을 넘어, 서로의 자녀들이 살아가기 원하는 미래의 희망을 먼저 논의함으로써 공감대를 넓혀야 한다"고 제언했다.
특히 북아일랜드의 신·구교도 간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을 소개하며 "보수와 진보가 극단적으로 나뉘어 자기 이야기만 하는 한국 사회에서도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솔직하게 끝까지 듣고 질문하는 평화 교육 모델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적 매개를 통해 4.3을 먼 과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느끼게 하는 중간 예술적 노력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 "전쟁은 문화적 발명품일 뿐…일상 속 '평화의 문화' 길러야"
한건수 교수는 세계대전 이후 폭력을 인간의 비관적 숙명으로 치부했던 지식인들의 한계를 짚으며, 일상 속에서 '평화의 문화'를 일궈나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 교수는 마가렛 미드의 연구와 유네스코 '세비야 선언'을 근거로 "전쟁과 조직적 폭력은 생물학적 필연이 아니라 대체 가능한 문화적 발명품에 불과하다"며 "인간이 갈등을 무력으로 해결하는 기제를 발명해 냈다면, 이를 대체할 평화의 방식 또한 발명할 능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과거 당연하게 생각했던 가부장적 문화가 오늘날의 세대에는 같은 기제로 작동하지 않는다는게 가까운 예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평화를 지향하는 가치관, 태도, 역량 등을 통해 평화의 문화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백범 김구가 역설한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은 곧 사랑과 자비를 바탕으로 한 평화의 문화였다. 우리 다음 세대가 일상 속에서 평화의 역량을 키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 차별에 맞선 80년 일본 민족학교의 '현장형 평화·인권 교육'
김세연 교사는 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백두학원 건국학교의 치열했던 설립 역사와 현재 진행 중인 평화 교육 실천 사례를 공유했다. 건국학교는 1946년 제주 조천 출신의 초대 이사장을 비롯한 재일동포들이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피와 땀으로 일군 학교다.
김 교사는 일본 정부의 조선인 학교 폐쇄령에 맞선 투쟁의 역사를 되짚으며, 제주와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학교의 뿌리를 설명했다. 현재 건국학교에서는 한국 전통문화 수업을 비롯해, 인근 고령자 시설과의 교류, 히로시마 원폭 피해 현장 답사 및 생존자 증언 청취 등 다양한 현장 중심의 평화·인권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김 교사는 "재일동포 사회가 겪어온 소수자로서의 갈등과 생존의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4·3의 가치를 일본 현지의 아이들과 어떻게 나누고 전승할 것인가를 계속해서 고민하고 실천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