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휘의 행간과 밑줄] ⑩ 블루프린트 (니컬러스 A. 크리스타키스, 이한음, 부키, 2022.)
2018년 예멘 출신 난민 수백 명이 제주로 입국해 난민 신청을 했을 때였다. 제주 사회는 술렁였고 반대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난민을 돕기 위해 집을 내어주고 일자리를 연결하며 손을 내민 제주도민들의 행보도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출향 해녀의 삶과 제주4·3 당시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야 했던 피난의 기억처럼,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간직한 제주의 역사 역시 이러한 연대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종교적 신념과 인권 의식, 개인의 가치관 등 다양한 요인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니컬러스 크리스타키스의 『블루프린트』는 인간이 어떻게 협력하는 사회를 만들어 왔는지를 진화생물학과 사회학, 인류학, 뇌과학을 넘나들며 설명한다. 예일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연구를 이끌어 온 저자는 인간에게는 이미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도록 진화한 일련의 성향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을 '사회성 모둠(Social Suite)'이라 부른다.
그는 모든 사회의 핵심에는 8가지 ‘사회성 모둠’이 있다고 말한다. ①개인 정체성 소유와 식별 ②짝과 자녀를 향한 사랑 ③우정 ④사회 연결망 ⑤협력 ⑥내집단 편애(자기집단 선호) ⑦온건한 계층구조(상대적 평등주의) ⑧사회 학습과 사회교육 이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도 가족과 공동체, 우정과 협력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유는 단순한 문화적 산물이 아니라 인류가 오랜 진화를 거치며 획득한 사회적 능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주에서 난민을 향해 손을 내민 사람들의 행동 역시 이러한 사회성의 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정 행동을 유전자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낯선 사람에게 공감하고 협력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인류가 오랜 시간 진화하며 갖추게 된 특성이라는 것이 크리스타키스의 설명이다. 물론 제주도민에게는 배타성도 분명히 있다. 내집단 편애 처럼.
저자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16세기 이후 난파선 생존자들의 기록을 분석하고, 수렵채집 사회와 해양 부족에 대한 인류학 연구, 유전학과 사회과학의 다양한 연구 결과를 폭넓게 소개한다. 소개된 사례 자체로도 흥미롭다. 특히 인간의 역사를 전쟁과 폭력의 연속으로만 바라보기보다, 수만 년 동안 인류가 어떻게 협력과 상호부조를 통해 살아남았는지에 주목한다. 인간에게 폭력성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함께 협력과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진화된 능력 역시 우리 안에 공존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다양한 행동경제학과 사회학 실험이다. 대표적인 '최후통첩 게임(Ultimatum Game)'에서는 사람들이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보다 공정성을 중시한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독재자 게임(Dictator Game)'을 비롯한 여러 변형 실험들 역시 인간이 상황에 따라 협력하고,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규범을 고려하며 행동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공정성과 상호성을 학습하고 실천하는 사회적 존재인 셈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크리스타키스는 앞으로 인류가 마주할 두 가지 기술적 도전에 우려를 표한다. 하나는 인간과 사회적 관계를 맺는 새로운 형태의 AI(자기 욕망이 포함된 AI)가 등장할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유전자 편집 기술(CRISPR)이 인간의 사회적 특성 자체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방향으로 사용될 가능성이다.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이 같은 급진적인 기술이 인간 사회를 가능하게 해 온 사회성 모둠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는 비관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인간은 폭력과 전쟁의 역사만큼이나 협력과 연대의 역사도 함께 만들어 왔으며, 사회성 모둠은 수십만 년의 진화를 통해 형성된 매우 깊은 토대라고 말한다. 결국 좋은 사회는 특별한 성인의 희생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신뢰하고 배우며 협력하려는 인간의 진화된 능력이 꾸준히 작동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희망을 찾아 여기까지 읽어왔다면, 다음 칼럼에서는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세속적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삶의 의미를 탐구한 랠프 루이스의 『신 없는 세계에서 목적 찾기』를 함께 읽어 보자. 인간은 왜 서로 협력하는가를 넘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면 좋겠다.
김대휘
김대휘는 기자생활을 30년 정도했다. 제주도기자협회장을 역임하고 제주CBS 보도국장에 이어 제주CBS 대표로 퇴직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함께 읽는 것을 좋아한다. 제주시 한경면에서 책방을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