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현 문학평론가 「오래된 숨」
제비꽃처럼 피어나는 산 자들의 기록
제주4·3이 국가 추념일 지정과 특별법 제정을 거치며 ‘공인된 역사’의 자리에 오른 지금, 문학평론가 김동현의 첫 소설집 「오래된 숨」은 그 제도화가 빚어낸 ‘안전한 희생 서사’ 바깥을 냉정하게 응시한다.
20년간 4·3과 오키나와, 동아시아의 기억과 문학을 깊이 있게 탐구해 온 저자는 비평과 분석의 언어로 끝내 다 담아내지 못한 침묵의 자리를 소설의 언어로 정교하게 옮겨놓는다.
국가가 승인한 ‘무고한 양민’이라는 이분법적 틀은 도망친 자, 떳떳하지 못한 생존자, 외면한 방관자처럼 공식적인 추모의 자리에 포함되지 못한 존재들을 쉽게 지워버린다.
이 소설집은 바로 그 지워진 경계선 위에서 손쉬운 애도를 거부한 채, 쉽게 종결되지 않는 죄책감과 견딤의 삶을 직시한다.
여섯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은 과거의 학살 현장을 정면으로 재현하는 방식에 머물지 않는다.
대신 역사적 폭력이 어떻게 한 사람의 몸과 말, 그리고 일상 속에 깊이 침전되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한다.
4·3이라는 직접적인 사건명을 명시하지 않고도 토벌의 확성기를 오늘날의 마을 방송과 포개거나, 무덤이 된 공장의 노동 현장과 결합하며 4·3을 박제된 과거가 아닌 현재형 권력의 문법으로 되살려낸다.
작가는 “사람이 죽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산 자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해지지 않은 기억들은 침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며, 아무도 심지 않았으나 봄마다 피어나는 제비꽃처럼 산 자의 일상 한가운데 살아 움직인다.
손쉬운 위로나 조급한 해답을 건네는 대신, 말해지지 못한 존재들 곁에 함께 앉아 견디기를 요청하는 이 소설집은 70여년의 증언을 지나온 제주 4·3 문학이 다다라야 할 새로운 시선이자 묵직한 응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