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집 ‘야생화와 혁명가 사이’ 출간
시인 고주희가 펴낸 새 시집 ‘야생화와 혁명가 사이’(걷는사람) 속에는 다양한 인물과 풍경이 담겨 있다.
‘무명천할머니’ 진아영, 북촌리 희생 합동 위령제, 백조일손지묘, 4.3평화기념관에 누워있는 백비, 그리고 미국의 인권운동가 ‘로사 파크스’, 팔레스타인 시인 ‘후삼 마루프’, 도산 안창호, 소록도에서 평생을 바친 수녀들, 파키스탄 벽돌 공장에 일하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 제주에 온 난민 등 공통점은 저마다 깊은 상처와 상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특징에 대해 책 해설을 쓴 황유지 문학평론가는 “이 시집은 온통 젖어있다”고 표현했다.
황유지 평론가는 “우리의 언어가 비진리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주희의 시어는 고심한다. 그리하여 시인의 언어로 옮겨 놓은 제주의 죽음과 먼데서 온 이름들은 지금 우리의 언어가 기입하는 비진리를 목도하게 하며, 그것이 다른 차원의 것으로 나아갈 길을 조심스레 터 준다”고 높이 평가했다.
신철규 시인도 “고주희 시인은 막막한 절벽 같은 그날과 그 이후의 시간들을 시에 ‘받아 적는다.’ 받아 적는다는 것은 대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목소리와 몸부림을 몸으로 껴안는 것이며, 한 자 한 자 그 대상에 되돌려 주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야생화와 혁명가 사이
고주희
밤의 치수를 재어야 하는데
온당한 마름질에 닿지 못하는 생각
어스름에 산책하러 나가
낮에 본 것들을 지우려는 되새기려는
두 가지의 심정이
신발 끈에 걸려 넘어질 때
앨라배마시의 한 백화점에서 일하던
여자는 흑인 전용 칸으로 가기를 거부했다
여자가 안경 너머 한 방향을 응시할 때
나는 부러진 나뭇가지로
잠시 허공에 길을 낸다
이마가 쓸리기 전
무릎이 꺾인 꽃이
조용한 오후였던 야생화의 얼굴로 발견된다
계획과 무계획처럼 시간의 정확성을 가진 말들은
강아지풀의 속수무책 간지럼에도
근엄한 자세를 참을수 있을까
팔꿈치 종아리 인중 콧대 심지어 발가락 손가락
수없이 베이고 넘어져 너덜너덜한 소녀일 때
피투성이 무릎에 호―오 호―오
숨을 불어 주던 가만가만 깁던
나의 피 흘리던 재단사들
운행이 시작되기 전 아침의 미화원으로
그들이 버스에 올랐을 때
종일 주방에 서서 일하는 무릎으로
창밖은 이미 검게 막 내린 버스일 때
표정의 깊은 골마다 새겨진
푸르고 때론 붉은 섬광들
최초의 로사 파크스*처럼
들판의 혁명가로 피어나는 밤의
* 1913.2.4.~2005.10.24. 현대 인권의 선구자
우무
고주희
흰 종지에 엎질러진 달빛은
세상의 모든 짠물을 가두고 얻은, 한 줌의 결정체 같아요
물에 든 어부나 어부를 걱정해야 하는 밖이나
접시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자세
몇 번 씹지 않고도 바로 삼킬 수 있는 것들이 필요했어요
우물우물하며 혼잣말로 내뱉은 바다
이름 밖에 서 있는 말캉한 얼굴들
바다가 고독에 든다면 저런 표정이겠지요
집이 글라, 이제는 글라 글어*
해지기 전에는 정작 집에도 못 돌아가는 어멍이
마방목지에 펼쳐진 말처럼 날뛰는
추운 이름을 거둬들이며
그러나 세상의 모든 바닥은 뜨거워
그 위에 널린 것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여름을 넘어서고
어멍은 얼음의 또 다른 전생인 것처럼 투명해졌지요
저녁은 찬물에 식은 밥 한술 떠 말고
온통 풋내 나는 것들로 수북해지는 일
빈 소라 껍데기들은 돌담 아래 묻고
아무것도 애쓰지 않았지요
종지에 놓인 것들은 좀체 줄지 않고
짜디짠 마농지 한 점에 욱여넣는 허기
여행자들이 지나간 자리엔
개의 발톱으로 파고드는 모래,
쑤다 만 밤은 거대한 묵 한 덩어리로 흔들리고
하얗게 쏟아지는 이 멀미는
언제쯤 끝이 날까요
* 집에 가자, 이제는 그만 가자.
고주희는 책머리에서 “부디, 제주 땅 모든 만물에 잠시 위로이기를 바란다”는 짧지만 묵직한 소감을 전했다.
고주희는 2015년 ‘시와 표현’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나무 없이는 아무것도’, ‘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 합동시집 ‘시골시인-J’를 냈다. 제2회 여순 10.19 평화인권문학상 시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179쪽, 걷는사람,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