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제78주년, 고양 총살 추정지서 진혼제
박진경 대령에 맞선 두 군인…“전국 공론화해야”
제주4.3 당시 강경 진압에 반발해 박진경 대령을 사살한 뒤 총살형을 당한 문상길 중위와 손순호(손선호) 하사의 넋을 기리는 진혼제가 경기도 고양시 현지에서 봉행됐다.
국가보훈부가 박 대령의 국가유공자 등록을 취소하고 인정 여부를 다시 심사하는 가운데, 참석자들은 두 군인의 저항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알리고 공론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통일청년회, 민주노총 제주지역본부, ㈔제주4.3범국민위원회는 지난 20일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일대에서 ‘제주4.3 제78주년 문상길 중위·손순호 하사 진혼제’를 봉행했다.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은 진혼제는 4.3 당시 무차별적인 도민 탄압에 항거했던 문 중위와 손 하사의 넋을 기리고 이들의 행적을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참석자들은 제주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해 가져온 보리빵과 옥돔, 고기산적, 나물 등 제수 음식을 꺼내 제사상을 차렸다. 이어 초혼과 초헌·아헌·종헌 등 제례를 집전하며 두 군인의 넋을 위로했다.
이날 경과보고에 따르면 문 중위는 1926년 10월14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동면 마령리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조선국방경비대 경비사관학교 제3기로 입교했다. 이후 제주 주둔 제9연대에서 중대장과 모병관으로 근무했다.
문 중위와 손 하사 등은 박 대령의 강경 진압에 반발해 1948년 6월18일 박 대령을 사살했다. 사건에 연루된 군인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사형을 선고받은 문 중위와 손 하사는 같은 해 9월23일 각각 총살됐다.
문 중위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지시로 무장대 측 김달삼과 두 차례 만났으며, 4.28 평화협상 성사 과정에 관여했다는 내용도 당시 군법회의 진술을 통해 전해진다.
경북 경주 출신인 손 하사는 대구 제6연대에 입대한 뒤 부산 하사관학교를 거쳐 제주에 배속됐다. 오랫동안 ‘손선호’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지난해 친족 증언과 족보 확인을 통해 본명이 ‘손순호’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거사 당시 박 대령 숙소의 당직사관이었던 양회천 이등상사는 군법회의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아 전주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4.3도민연대는 2023년 전주형무소 순례 당시 양 이등상사의 위패를 모시고 진혼제를 봉행하기도 했다.
추도사에 나선 임문철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나치 독일의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돼 처형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를 언급하며 문 중위와 손 하사의 저항이 지닌 의미를 되짚었다.
임 이사장은 “제복을 입은 군인으로서 상명하복이 제일 큰 덕목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앞서 시민이라는 의식이 중요하고 시민으로서의 소명이 앞선다”며 “문상길 중위와 손순호 하사의 정신이 오히려 요즘 군인들에게 가르쳐야 할 참된 군인정신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문상길 중위의 삶과 정신을 더 알고 싶었지만 자료가 워낙 부족하다”며 “그동안 많은 분이 문 중위의 정신과 죽음을 연구하고 기리는 동안 재단이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데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문상길 중위의 의로운 죽음과 저항이 학술 연구와 여러 행사를 통해 널리 알려지고 공유됐으면 좋겠다”며 “제주4.3평화재단도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임 이사장은 강우일 주교가 전한 “두 분의 의로운 저항과 죽음에 경의를 표한다”는 메시지도 참석자들에게 전했다.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대표는 문 중위와 손 하사 등의 행적을 제주를 넘어 전국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대표는 “박진경만 말로 거론할 것이 아니라 문상길 중위와 손순호 하사 등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질 수 있도록 공론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 분들은 애국 군인들”이라고 말했다.
이어 “4.3 80주년에는 전국 단체들이 함께하는 사업으로 확대하고, 국회에서도 이들의 행적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며 “선언에 그치는 80주년이 아니라 실질적인 사업을 해야 한다”고 전했다.
한편 국가보훈부는 박 대령의 국가유공자 등록 과정에서 보훈심사위원회 심의·의결이 누락된 절차상 하자를 확인해 기존 등록을 취소하고, 유공자 해당 여부를 다시 심사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 단체가 정부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수정을 요구하고, 박 대령 추도비 옆에 설치된 안내판을 철거하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해당 안내판에는 박 대령이 제주 주둔 제9·11연대를 지휘하며 강경 진압 작전을 벌인 사실과 그의 작전참모였던 임부택 대위가 법정에서 “조선 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30만 도민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취지의 발언을 들었다고 증언한 내용 등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