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관련 국내외 언론 보도를 매일 자동으로 수집·아카이빙합니다
홈 › 기사 › 제주일보

“제주4·3의 정신, 세계인의 유산이 됐다”

화해와 상생으로 과거사사건 극복한 모범 사례

유족·시민사회단체 등 아래서부터 진상규명 운동

영모원 위령비·4월제…모두가 희생자라는 인식

2025년 4월 11일 제주4·3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제주4·3은 침묵과 금기의 역사에서 세계의 유산이 됐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끝이 아니라 4·3 세계화를 위한 시작이다. 본지는 4·3기록물이 살아 있는 인류의 자산이 되기 위한 방안에 대해 세 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진실을 밝히다 : 제주4·3 아카이브(Revealing Truth: Jeju 4·3 Archives)’의 세계기록유산은 1만4673건에 이른다.

1948~1949년 군사재판 기록인 수형인 명부와 육지 형무소에서 보낸 엽서(27건), 희생자와 유족들의 증언(1만4601건), 시민사회단체의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운동 기록(42건), 정부의 공식 진상조사보고서(3건) 등이 포함됐다.

광복 이후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 제주4·3이 발생하면서 국가폭력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당했다.

피해자와 가해자 간 반목을 딛고 화해와 상생으로 과거사사건을 극복한 모범 사례가 4·3기록이다.

비극적 상처를 국가 주도로 극복하기 보다는 도민들이 아래서부터 주도해 화해와 상생의 정신을 전 인류에 보여줬다.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적 대립과 분열이 아니라 모두가 희생자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화해와 상생을 이뤄낸 대표적인 추모 공간이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의 영모원(英慕園)이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고 새겨진 비문은 4·3의 정신으로 각인됐다.

2003년 하귀리 영모원을 시작으로 상가리(2006), 와흘리(2006), 동복리(2007), 도련동(2008), 도남동(2012), 장전리(2015), 광령리(2018), 고성리(2019)에도 4·3희생자와 군경 전사자의 넋을 함께 기리는 추모공간이 조성됐다.

4·3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징역 15년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수감 중이던 문숙현씨(제주읍 삼도리·당시 25살)는 1949년 2월 11일 어머니에게 엽서를 보냈다.

“형님과 늙으신 어머님, 처자식의 소식을 듣고 싶사오니 속히 답장하여 주십시오. 할 말은 태산같이 있어도 그만 그칩니다….” 그는 할 말이 많았지만 모두 말하지 못했다.

엽서는 형무소 검열과 군 검열까지 받았다.

문숙현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학살됐다.

‘형무소에 온 엽서’는 4·3 당시 억울하게 육지 형무소로 끌려간 수형인들이 고향의 가족들에게 보낸 마지막 안부 편지다. 모진 고문과 수감 생활의 고난 속에서도 늙으신 부모님의 건강을 걱정하고, 자식의 혼사를 묻거나 딸의 이름을 부르는 등 애틋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겨 있다.

고난과 박해를 증언하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1963년 재판 기록인 ‘형사법원 사건번호 제253호(넬슨 만델라 등에 대한 공소문)’는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넬슨 만델라의 유산은 용서와 화해, 인종 차별(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 갈등을 넘어선 평화적 공존과 민주주의의 승리로 귀결된다.

지난해 10월 15일 국회의원 회관에서 열린 ‘제주4·3 특별전’에서 당시 우원식 국회의장은 “제주4·3의 역사가 있었기에 우리는 2024년 12·3 계엄사태를 막을 수 있었고, 그런 힘이 4·3의 역사 속에서 나왔다. 그래서 국민들은 제주4·3에 대해 늘 죄송스럽고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제주4·3은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일깨우고 치유와 회복을 위한 지역공동체의 강인한 정신과 모범적 실천을 보여주는 세계인의 유산이 됐다”고 말했다.

■ 인터뷰-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4·3의 세계화, 문화예술로 창작돼야”

“유네스코가 1만4673건의 4·3기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한 것은 방대한 자료보다는 화해와 상생의 정신을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기록유산의 중요한 요건은 현재 진행형이 아니라 ‘완결성’과 ‘차별성’이라고 밝혔다.

양 실장은 냉전시대 국가폭력 희생이나 인권 유린을 다룬 기존의 기록유산과는 달리, 제주4·3은 유족과 시민사회 등 아래서부터 자발적으로 진실을 밝혀내면서 국가의 조사와 공식 사과를 이끌어냈다고 설명했다.

특히, 보복이 아닌 ‘화해와 상생’으로 국가 공권력의 잘못을 청산하고 과거사를 해결한 모범 사례여서 기록유산에 등재 됐다고 밝혔다.

그는 화해와 상생을 증명할 기록으로 ‘영모원’과 1994년 4월 3일 제주시 탑동광장에서 봉행된 합동위령제인 ‘4월제’를 꼽았다.

과거 4·3위령제는 무장대에 희생돼 반공 색채가 있었던 유족회와 시민사회단체 중심의 ‘사월제 공동준비위원회(공준위)’가 각각 따로 봉행했다. 4·3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도 컸다.

그는 “1994년 첫 합동위령제가 봉행됐고, 제주도의회 4·3특위가 중심이 돼 피해신고를 받으면서 1999년 국회 본회의에서 4·3특별법이 만장일치로 통과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양 실장은 4·3의 세계화를 위해서 번역과 문화예술의 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원래 ‘제주4·3 기록물’이 정식명이지만, 전 세계인들이 4·3을 이해할 수 있도록 Archives(기록물) 앞에 ‘Revealing Truth(진실을 밝히다)를 붙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한강 작가가 4·3을 주제로 한 ‘작별하지 않는다’ 소설을 발표했고, 소프라노 강혜명의 창작 오페라 ‘순이삼촌’ 영상이 프랑스에서 상영된 후 제주4·3에 대한 외신보도가 크게 늘었다”면서 “결국 4·3의 세계화는 기록유산에 머물지 않고 문화예술로 창작돼야 전 세계인이 이해하고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