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식 비상임논설위원·제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제주4·3을 앞두고 이재명 대통령이 제주를 찾아 국가폭력 범죄의 공소시효 폐지와 책임자 서훈 취소를 언급했다.
이는 단순한 정책 제안을 넘어 국가가 더 이상 과거사 문제의 방관자가 아니라 판단의 주체로 나서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31일 오전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반헌법행위자열전' 출간 기자회견 역시 같은 문제를 드러낸다. 민간 연구자들이 10여년에 걸쳐 축적한 기록은 국가폭력의 실상을 밝혀냈지만 동시에 한계를 보여준다. 기록은 쌓였으나 판단은 유보돼 왔다는 점이다. '역사의 법정'이라는 이름 아래 시민이 나서서 국가가 비워 둔 자리를 메운 것이다.
책임 편집을 맡은 한홍구 교수는 소송과 사회적 갈등까지도 감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용기라기보다 국가의 공백을 드러내는 말이다. 역사적 판단이 개인에게 맡겨질 때 사회는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다. 각자의 정의가 충돌하는 자리에서는 공적 기준이 성립할 수는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해석의 과잉 상태에 놓여 있다. 동일한 사건도 진영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사실마저 선택적으로 수용된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말하기를 "저쪽에도 하나의 시비가 있고 이쪽에도 하나의 시비가 있는 법"이라고 해 각자 상이한 입장에 따른 자신만의 해석을 주장하는 상황을 지적했다. 그 결과는 진실의 확장이 아니라 분열이다. 진실은 사소한 성취에 가려지고 말은 화려한 수사에 묻힌다.
공자 또한 기준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어긋나게 된다고 했다. 말이 어긋나면 결국 판단 전체가 흔들린다. 지금의 혼란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해석은 본래 다양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양성을 종결할 기준이 없다는 데 있다. 해석이 끝없이 병존하면 사회는 '해석의 경쟁'에 머무를 뿐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주장이나 자료가 아니라 해석을 종결지을 공적 판단이다.
그 역할은 국가가 맡아야 한다. 국가는 공동체의 기준을 확정하는 최종 책임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과거 국가가 진실을 왜곡했던 사례가 있다 해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제는 책임 있게 나서야 한다. 제주4·3이나 여수·순천 사건과 같은 사례가 오랫동안 왜곡된 이름으로 남아 있었던 사실은 국가 부재의 결과를 잘 보여준다.
이번 대통령의 발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공소시효 폐지와 서훈 취소는 과거를 시간에 맡기지 않고 책임으로 판단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는 해석의 난립을 넘어 공적 기준을 세우겠다는 선언이다.
민간의 기록은 출발점으로서 이미 그 의미를 갖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양한 해석 속에서 진실은 쉽게 상대화되기 때문이다.
결국 국가가 제도적 절차를 통해 진상을 확정하고 책임의 범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 과거사 청산은 보복이 아니라 기준의 확립이다. 기준이 없는 사회에서는 정의도 설 수 없다. 이제 대한민국은 선택해야 한다. 해석의 분열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공적 판단으로 나아갈 것인가.
역사는 기록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판단될 때 비로소 역사로 남는다. 그리고 그 판단은 이제 국가가 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