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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제주일보

제주4.3 양민 학살한 군 수뇌부 '단죄' 여부 주목

명예회복 법제화 진상규명
요약

이재명 대통령이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의 오찬에서 국가폭력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하겠다고 밝혔으며, 양민을 학살한 군 수뇌부의 단죄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박진경, 송요찬, 함병선 등 고위 장교들이 주도한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2만5000~3만명의 도민이 희생되었으나, 이들은 국가유공자로 인정되거나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광주 5·18의 책임자 처벌 및 진상규명 사례와 달리, 제주4.3의 가해 주체와 명령 체계 규명이 여전히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광주 5·18 책임자 처벌 및 진상규명으로 '민주화운동' 명명

이재명 대통령이 29일 제주를 방문, 제주4·3희생자유족회(회장 김창범)와 가진 오찬에서 국가폭력 범죄에 대해 공소 및 소멸 시효를 완전히 배제하겠다고 밝히면서 귀추가 주목된다.

4·3희생자유족회는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양민을 학살한 군 수뇌부에 대한 단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과거사 사건의 공과(功過)에 대해 냉정한 평가가 필요한 이유는 광주 5·18은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으로 사건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명칭이 정립됐기 때문이다.

7년 7개월 동안 전개된 제주4·3사건(1948~1954)에서 2만5000~3만명의 도민이 희생됐다.

제주4·3이 발발하자 약 한 달 후인 1948년 5월 6일 육군 9연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한 박진경 중령은 양민을 무차별 검거·연행, 강경 진압 작전을 주도하고도 그해 6월 대령으로 진급했다.

정부의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박 대령은 제주 부임 후 43일 동안 진압 작전을 전개해 입산자 등 도민 3000여 명을 체포했다.

일부는 군경 합동심문을 받고 풀려났지만, 수용시설에 구금된 도민들은 총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

그럼에도 정부는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 박 대령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서훈했다. 박 대령은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사망했음에도 전몰군경으로 인정돼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1948년 12월 제주에 부임한 함병선 육군 2연대장(중령)은 6개월 동안 토벌 작전을 주도해 이 기간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2연대는 여순사건을 진압, 실전을 쌓은 부대였다.

송요찬 중령은 4·3당시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마을을 통행하는 자는 이유 불문하고 총살한다’는 초토화 작전을 수립,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양민 학살을 주도한 인물 중 한명으로 꼽힌다.

문용채 전 제주경찰서장은 제주4·3 당시 취임사에서 ‘도민들은 무조건 경찰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항거의 태도를 취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일본 만주국 헌병 소위 출신인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김명 대위는 2연대 작전참모로, 함병선 2연대장의 지시로 1949년 2월 봉개마을을 초토화시킨 장본인이다.

함병선과 김명의 이름을 조합해 재건된 봉개리 마을 이름이 ‘함명리(咸明里)’로 명명되기도 했다.

4·3 당시 양민 학살을 불러온 작전을 보면 ▲박진경 대령의 9연대 진압 작전(1948년 5월~7월) ▲송요찬 육군 계엄사령관의 초토화 작전(1948년 11월) ▲함병선 2연대장의 토벌 작전(1948년 12월~1949년 7월)이 꼽히고 있다.

양민을 학살한 고위 장교들은 4·3당시 무장대 토벌 작전에서 공을 세웠다며 국가유공자가 되거나 서훈을 받기도 했다.

2003년 정부의 4·3진상보고서는 피해 실태 위주로 기술됐고, 국가폭력 범죄를 저지른 가해 주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담지 못했다.

여순항쟁 연구자인 주철희 박사는 과거 세미나에서 “4·3은 70년이 지났지만 정부의 진상보고서에 가해 주체와 지휘·명령 체계를 밝히지 않은 것은 여전히 풀지 못한 제주4·3의 과제”라며 “향후 진상 규명에서 가해자를 기록해야 4·3의 역사를 규명하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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